그옛날 이야기/제로보드 백업

사람. 그리고 그에 대한 느낌.

캔디냥 2002. 10. 20. 22:23

권교정의 만화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에 나오는
'아서 맥스웰'이라는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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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타인을 재는 기준은
오로지 그 인간이 얼마만큼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하는 것 뿐일세.

아마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을테지.
......어째서일까.
어째서 내겐 없는 것일까.]



[그런 감정을 느껴보고 싶으신가요?]



[아니.
그저 이상하다고 생각할 뿐.
그 애정이란 감정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단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좀 곤혹스러울 때가 있긴 해.

남에게는 '절실한 이유'가 되는 것이
나에겐 아무 가치도 없고 전혀 이해되지도 않으니까.

특히! '사랑때문에-'운운하는거!]



[.....예...
그렇습니까..]



[......나한테도 특별히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은 있어.
함께 있으면 즐겁거나 편안한.....
그래서 한때는 그런 것이 소위 말하는 '애정'인 줄만 알았지.

그런데-
내가 생각한 '애정' 과 타인이 알고 있는 '애정'이란 것이 달랐어.

..나는 좋아했던 사람을 잃어도 마음 아파한 적이 없다네.

그저- 아주 조금
아쉬울 뿐.

나는 사람 자체를 좋아했던 게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좋아한 건 '그 사람'이 아니라
'그'가 내게 보여주는 '행동'들 이었던 거다.

사람들은 대개..... 이 두가지를 분리해 내지 않더군.
아니.. 아마 그럴 수 없는거겠지.

그렇지만 내겐 한 인간과 그가 지니고 있는 특질이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인식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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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과 그가 지닌 특질을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는 것.
나도 어쩌면 조금은 그런 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그런 것들이 모여서 그 사람을 이루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내가 좋아하고 있는 것은 그가 보여주는 모습들.. 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난 사람과 헤어지고 나면 그 사람의 정확한 얼굴을
떠올릴 수가 없게 되어 버린다.
이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
원래 신경쓰지 않는 일에는 기억력이 발동하지 않으니까(^^;)
나에게 몽타쥬 작성 따위를 시키다간 어떻게 되어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다.
실은 가족들의 얼굴.. 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어차피 희미한 이미지일 뿐이지 뭘.
(근데.. 정말 나만 이래-_-? 다들 깨끗하고 확실하게 기억한다 말할 수 있을까?)



원래 사람을 볼 때는 얼굴을 기억한다기 보단
이미지를 기억하는 일이 많은데..
이를테면,


짜증을 낼 때의 찡그리는 눈썹.

웃을 때 휘어지는 눈매.

놀랐을 때, 쑥쓰러울 때 짓는 표정.

가끔씩의 휘젓는 듯한 제스춰.

서 있을때 약간 삐딱한 자세라든지,

대화를 할 때면 또렷히 바라보는 눈동자.

'아잉~'이라고 애교를 떨었을 때의 그녀의 목소리 톤.

언젠가 닿았던 손 끝의 온도.

생각해 주는 마음씨.

그 사람이 쓰는 향수의 냄새.

안녕-이라고 손을 흔들 때의 모습.

그리고...그/그녀가 나와 함께 있었을 때의 분위기.
그리고 그때 내가 받았던 모든 느낌의 총합계.


이런 것으로 사람을 기억하게 된다.



.. 이러면 가끔씩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일이 많은데,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든지,
다시 만났을 때 기억과는 다른 느낌에 당황한다든지.

.. 아니면 신경쓰지 않고 만났었다가
달라진 모습에 놀란다든지.

갑자기 너무 반가워서 스스로 놀란다든지(^^;)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다른 모 홈의 다이어리를 봤더니, (피모님 꺼라고는 말 못하는..[퍽])
뭔가..나만 이런 것도 아닌 듯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새롭다는 것.
이건 좋은 것일거다.



그 사람이 보여주는 느낌들 만을 기억한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과, 그 사람의 행동을 구분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보여주는 행동들이, 바로 그 사람.
그 일면을 내가 보고 있는 것이기에.
[아서 맥스웰]처럼 그런 것을 구분해 낼 수는 없다.

아마 내가 주위의 누군가를 잃게 되면,
아마 아쉽게 될 거다.
그치만 그것은 마음이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보여주는 것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는 데서 오는,
크나큰 아쉬움일 테지.

그 사람 자체의, 그 사람이 보여주는 행동들을
더더욱 많이 보기를 원하기 때문일 거다.
아마도 그것이 내 나름대로의 [애정].



...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생각하자구.
느낌은 언제나 바뀌는 것이고,
생각은 할 수록 달라지는 것.



오늘도 '느낌'을 갖기 위해 살았고,
내일도 뭔가 '느낌'을 찾아 헤매며 살아갈거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나에 대한 느낌을, 바라건데 좋은 느낌을
주기 위해서도 살아갈테지.